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는 요즘, 이 문제에 정답이 하나일 리 없다. 다만 힌트를 얻을 곳은 있다.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의 현장이다. 그중에서도 태생부터 AI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업이라면 어떨까. 그런 곳을 들여다보다 보면 의외의 실마리가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CIO 코리아는 소위 AI ‘네이티브(Native)’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 실무자를 직접 만나 보았다. 미국 실리콘밸리 AI 스타트업 감마(Gamma)의 안채민 시니어 프로덕트 디자이너(AI·혁신 담당), APAC 스타트업 파트너십을 담당하는 앤트로픽의 이엽 총괄, 그리고 뉴욕 구글 딥마인드 제미나이팀의 서준표 프로덕트 매니저(PM)이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AI 중심 조직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고,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떻게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살펴본다.
완성이 없는 제품, 멈추지 않는 조직
감마는 ‘AI PPT’ 서비스로 유명한 스타트업이다. 20여 개 AI 모델을 활용해 원하는 바를 텍스트로 작성하면 PPT를 뚝딱 만들어주는 그런 서비스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주도해 온 프레젠테이션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감마는 생성형 AI 붐과 함께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현재 연간 반복 매출(ARR)은 1억 달러(약 1,500억원), 사용자 수는 1억 명을 돌파했다.
이곳에 근무하는 안채민 디자이너는 감마에서 느낀 독특한 특징에 ‘완성이 없다(no doneness)’를 들었다. 제품이 끊임없이 변하고, 모든 팀이 동시에 서로 다른 것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감마가 올해 3월 공개한 AI 이미지 생성 기능 ‘이매진(Imagine)’은 초기 아이디어 구상부터 실제 서비스 반영까지 단 두 달 만에 이뤄졌다. 안 디자이너는 “일반적인 디자인 조직이었다면 최소 3~4배는 더 걸렸을 것”이라며, “프로젝트마다 개발 속도는 다르지만, 이매진의 경우 약 8주 만에 제품을 출시했다”라고 설명했다.
감마의 빠른 실행력이 단지 구성원이 똑똑해서 생긴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2가지 문화가 뒷받침됐는데, 첫째는 ‘보여주고 나서 말하기(Show, then tell)’다. 감마에선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이나 스케치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보여준다. 부서나 직급은 상관없다. 가령 복도에서 공동설립자가 ‘이런 기능을 보고 싶다’고 말하면, 몇 시간 안에 누군가 프로토타입을 뚝딱 만들고 며칠 안에 출시까지 이어지곤 한다. 이런 방식은 결과물 생성 속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자칫 감정적으로 길어질 수 있는 논쟁을 줄이고, 보다 건설적으로 방향성을 공유하며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둘째는 ‘빨리 틀리기(be wrong fast)’다. 공식 사내 용어는 아니지만, 안채민 디자이너가 속한 AI팀 전체가 공유하는 제품 개발 접근법이다. 안 디자이너는 “이 접근법 하에 2주 동안 올바른 해결책을 놓고 토론할 수도 있고, 2~3일 안에 실험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사용자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다”라며 “AI 시대의 진짜 리스크는 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솔루션을 완벽하게 다듬는 데 매몰돼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엽 총괄은 구체적인 내부 절차에 대해서는 대외비를 이유로 말을 아꼈지만, 제품 개발 속도만큼은 지금껏 경험한 어떤 기업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입사 5개월 만에 신규 AI 모델 2~3종, 코워크(Cowork), 에이전트 팀즈(Agent Teams), 컴팩션(Compaction) 등 굵직한 기능 출시를 연이어 경험했다.
이엽 총괄은 “공동창업자 벤 만이 한국에서 발표했던 슬라이드가 불과 1주일 만에 구식이 될 정도로, 그 사이에도 새로운 기능이 계속 출시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AI와 같이 변화 속도가 빠른 분야에서는 최신 정보를 파악하고, 공유하고, 빠르게 실행하는 것 자체가 조직의 기본기가 되고 있는 셈이다.
100% 신뢰를 기반으로 한 수평적 토론
속도만으로는 조직이 움직이지 않는다. 빠르게 실행하려면 그에 맞는 의사결정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세 인터뷰이 모두 수평적인 토론 문화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은 같았지만, 의견을 조율하고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는 각기 다른 특징이 있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서준표 PM은 자신이 겪은 구글의 의사결정 문화를 “바텀업(Bottom Up) 성향이 강하다”고 표현했다. 큰 방향은 임원진이 제시할 수 있지만, 제품 개발의 실질적인 키는 매일 제품을 들여다보는 PM이 쥔다. 지표를 분석하고 사용자 행동을 관찰하다 ‘지금은 이런 기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직접 제안하고 밀어붙인다.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는 대신 각자가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서준표 PM은 “PM의 역할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의 기획자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미국 빅테크에서의 PM은 훨씬 더 주체적이고 제품 서비스 개발을 이끄는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PM은 엔지니어나 디자이너의 성과를 평가하는 팀장과 같은 위치가 아닌데, 그러다 보니 PM은 제품 방향성을 제시하더라도 이를 실행하게 만드는 힘은 결국 설득력에서 나온다”라고 설명했다.
이엽 총괄은 앤트로픽을 “모두가 서로를 100% 신뢰하는 것이 느껴지는 회사”라고 묘사했다. 다양한 스타트업을 경험한 그도 이 정도의 신뢰감은 처음일 정도다. 이 총괄은 “CEO인 다리오 아모데이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누구나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고, 다리오도 적극적으로 이견을 제시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사결정권자의 결정이 내려지면 그것을 존중하는데, 이엽 총괄은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신뢰가 없으면 어려운 부분”이라고 표현했다.
앤트로픽에서 이런 신뢰가 가능한 이유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낮은 에고(Low Ego)’다. 풀이하자면 직급이나 체면을 우선하지 않고 피드백에 열린 태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엽 총괄은 “흔히 말하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분들이 많고, 과거 큰 조직에서 임원을 지낸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에고가 매우 낮다”라며 “덕분에 토론이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논리와 근거 중심의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안채민 디자이너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제품 방향을 두고 강하게 반대하더라도, 일단 방향이 결정되면 모두가 그 결정에 맞춰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대부분의 의견 충돌이 ‘맥락의 불균형(context imbalance)’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한쪽이 가진 과거 데이터나 사용자 피드백을 다른 쪽은 충분히 공유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그래서 안 디자이너는 서로가 동일한 수준의 맥락을 공유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과정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패를 다루는 방식
빠른 실행에는 분명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실패도 뒤따른다. 그리고 이런 실패를 방치할 경우 조직은 책임 공방과 비난으로 흐르기 쉽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를 어떻게 다룰까?
안 디자이너에 따르면, 감마는 매 출시 이후 ‘레트로(Retro)’라는 회고 형태의 논의 과정을 진행한다. 관련 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엇이 잘됐는지’와 ‘어떤 부분이 더 매끄러울 수 있었는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레트로의 핵심 목적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있다.
예를 들어, 레트로에서 팀 간 소통 공백이 문제로 드러나면, 다음 프로젝트에선 팀장들이 더 선제적인 소통 계획을 짜거나 인력·시간 배분을 다시 들여다본다.
앤트로픽에서는 실수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업계 최상위권 AI 모델을 개발하는 기업인 만큼, 작은 판단 하나가 미치는 파급력도 크기 때문이다. 특히 ‘안전한 AI’ 모델 개발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는 만큼, 이엽 총괄 역시 의사결정과 관련된 정보를 전달할 때마다 신중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으로 이엽 총괄은 일주일에 하루 일정을 비워두고, 이른바 ‘생각하는 시간’으로 활용한다. 이 시간 동안 전략 방향을 점검하고, 자신의 판단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조정한다는 설명이다.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내부·외부 AI 기술을 직접 탐색하며, 이를 업무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고민한다.
이엽 총괄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들을 다루다 보니, 일부러라도 멈춰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래야 새로운 시각도 나올 수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서준표 PM은 이 벅찬 속도 속에서 균형을 잡는 자신만의 방법을 공유했다. 그는 구글에서 바텀업으로 일을 만들어나가는 스타일인 만큼, 실패에 대한 책임 역시 스스로 져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그는 “책임지는 문화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며 “주니어든 시니어든 책임도 안 지겠다는 태도는 본인의 성장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뻔한 말일 수 있지만 AI 시대 역시 직접 부딪혀 보면서 배우는 경험 자체가 결국 자기만의 판단력과 실행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jihyun.lee@foundryco.com
*이번 시리즈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